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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속으로] 불교와 문학

이설영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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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21.06.07 14:59
  • 기자명 By. 충청신문
이설영 시인·문학평론가
이설영 시인·문학평론가
문학은 삶의 모든 부분을 탐구하는 광범위한 심오한 예술이라면, 불교는 인간의 삶 그리고 숙명론을 다루는 방대한 불법 철학이다. 서로 긴밀한 통일성이 있고 결코 뗄 수 없는 유기적(有機的)인 관계로 마치 필연적인 동지 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어떤 사상이나 철학을 조금씩 간접에서 직접적으로 맞닿으면서 문학과 불교는 어떤 본질적인 면에서 서로 융합하는 심적 작용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 시적 자아가 달라지고 미적 통일성을 찾아내기도 한다.
신앙을 믿고, 안 믿고를 떠나 문학 작가는 불교와 친밀해야 좀 더 깊은 작품을 쓸 수 있다.
불법 철학에 다가가면 문학에서 필요한 양분들을 무수히 흡수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한가지 예를 들어 불교 지식에서 어떤 한 면을 소개하자면 십계호구(十界互具)를 통하여 각가지 인간 본연의 생명을 들여다볼 수도 있고 삶과 인연, 숙명, 생노병사가 팔만사천법장 안에 모두 펼쳐져 있으며, 자연의 섭리, 우주의 섭리에도 심오하게 접근할 수 있기에 경세적인 작품을 잉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게 된다.

문학과 긴밀한 연결고리를 찾아보자면 끝이 없지만, 불교 또한 결국 인간의 삶에 대한 연구이고 탐구이다. 글을 쓰는 작가로서 심오한 철학을 투영시켜 글을 쓴다면 불교 특성의 정서에서 품어져 나오는 미의 가치가 정서 환기를 시키고 문학의 영역과 미적 범주를 확장시키는데도 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불법 철학을 통해 자아 성찰은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된다. 그래서 문학은 불교를, 불교는 문학을 서로 사랑할 수밖에 없다.

불가에서 예로부터 자주 쓰이는 말 중에 육근청정(六根淸淨)이라는 진리를 깨달아 몸과 마음의 탐욕과 집착을 끊고 깨끗해지는 것, 눈. 귀. 코. 혀. 몸. 생각의 여섯 가지 기관이 업식(業識) 카르마Karma 에서 벗어나 청정한 것을 말한다. 한마디로 함축하면 맑고 투명한 생명을 의미한다. 이처럼 문학도 글을 쓰는 사람들의 광활한 수행기관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러하기에 큰 바다로 나아갈 우리들의 언어의 빛깔은 남달라야 한다. 세상에 띄우는 메시지에도 격이 있다. 그 차이는 작가의 생명 상태에 따라 분명 각기 다른 형상으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작가 생활에 있어 너무 자기중심적으로 나르시시즘에 빠진 작가이기보다 항상 낮은 자세의 이름 겸손의 꽃을 가슴에 심어 나를 돌아보고 다듬으며 작품 세계에 임해야 할 것이다
요즘 시대에 결여된 작가 정신에 있어 많이 아쉬운 부분이다.

맑고 투명한 마음, 삶의 경륜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내면의 경지, 어쩌면 부처로서 수행하는 것처럼, 문학가라면 청정한 마음으로 글을 써야 하는 것이 기본자세고 작가의 자질로서 꼭 필요한 덕목들이 아닐까? 비움의 미학도 필요하다. "갱허갱신" 비울 때 비우고, 채울 때 채우라는 말이 있다. 비움으로써 새로운 것을 담을 수 있는 것처럼, 욕망의 무게는 내려놓아야 한다.
문인으로서 명예에만 지나치게 치우치는 경향성은 안타깝게도 흔하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작품 위주로 창작활동에 올인할 수 있는 문학도가 진정한 작가가 아닐까?
이런 점에서도 문학과 불교는 일맥상통하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작가라면 사명의식을 일깨우고 자각하여 그 역활에 있어 소신을 다해야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진정한 충실감의 묘미를 느낄 수 있다. 암흑 같은 세상에 떠오르는 태양과 같이 어둠을 비추는 등불처럼 문학은 세상의 등대이기에 사명의식에서 빚어지는 작품은 깊은 뜻을 내포하고 그 교술적인 작품성은 많은 사람으로부터 공감과 사랑으로 외경심을 불러낼 수 있다.

문학의 길은 부처의 수행과 같이 고행길이다. 불교에선 "번뇌즉보리" 라는 말이 있다. 번뇌의 장작을 태워 괴로움을 행복의 에너지로 바꿀 수 있음을 뜻하며 고뇌를 뚫고 자신을 끊임없이 연마하고 단련하는 과정이야말로 진정한 생명의 환희를 만들어내며, 작품으로도 자신을 승화할 수 있는 진정한 작가로 탄생시킨다.

요즘은 문학 세상으로 쉽게 입문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는데, 눈앞에 반짝이는 화려한 별만 보고 따라온 길이 번뇌의 숲에 발을 디뎠다는 것을 처음엔 인식하지 못한다. 진정 글을 쓰려면 자신에게 좀 더 엄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문학은 굉장한 투쟁이기 때문이다. 먼저 나 자신과의 투쟁이 중요하다. 그것이 없으면 결코 명작이 탄생할 수 없다. 두번째로 세상을 향한 투쟁심이 있는가? 사회 부조리와 혼탁한 무리와의 투쟁을, 펜대의 힘으로 세상을 움직여 가는 고단하고 위대한 작업이기에 문학이란 불교처럼 깊고 숭고한 이름이라 말하고 싶다. 문학은 인간의 사상에서 중대한 위치를 차지하며 그 영향력은 훌륭한 가르침처럼 인간이 영위하는 삶의 깊은 곳까지 미친다.

작가는 우주의 법칙과 소통하며 예리하게 모든 것에 주시한다. 불도수행도 우주의 법칙에 주파수를 맞추어 깊은 통찰력을 갖춘다. 문명의 발달로 혼탁해져 가는 세상 속에서 움츠린 벗들에게 용기와 희망과 교훈을 부여하고 인간을 자비로 감싸는 펜대의 힘, 그리고 혼탁한 세상의 심장위로 심폐소생 하여 생명을 불어넣는 숭고한 선의 또다른 이름 그것이 문학인 것이다.

문학과 불교에 대한 관점으로 보자면 무수한 상념이 머리를 맴돈다. 통일성을 갖춘 모든 소중한 가치를 나열하기엔 너무 긴 장문이 될듯해 필자의 마음속에서 일맥상통하는 언어들을 말하자면 대략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문학 <=> 불교

올바른 신념 그것을 증명하는 것. 진리의 등불. 평화를 찾아가는 지름길. 포괄성과 수용성을 겸비한 양식. 진정한 인간 중심 생명 존엄의 휴머니즘 철학. 열린 지성의 힘. 무한한 희망의 이명(異名)

간략하게 핵심만 보아도 문학 작가들이라면 충분히 공감하고도 남으리라 생각하며 마지막으로 위 내용을 핵심적으로 간추려 보자면 불교를 문학적으로 좀 더 깊게 접근하여 연구하고 분석할만한 위대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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